즉시 전력감 원하는 대기업, 대졸 공채 없애고 ‘중고 신입’ 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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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대기업 중 삼성만 유일하게 공채 유지
500대 기업 57%가 하반기 채용 계획 없어
대졸 신규 입사자 절반이 경력 기간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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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 대기업에서 ‘중고 신입’의 입사가 늘고 있다. 주요 대기업들이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신입직원 공개 채용(공채) 제도를 없애고 결원이 발생한 자리에 적합한 경력직을 수시 채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20대 청년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진 모습이다. 실제로 국내 500대 기업의 절반 이상이 올해 하반기 신규 채용을 하지 않으면서 20대 청년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중이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해에 이어 5대 그룹 중 삼성만 유일하게 공채 실시

28일 재계에 따르면 올해 삼성그룹 계열사의 하반기 공채 경쟁률은 지난해보다 높은 80대 1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대기업들이 인력 감축에 나서면서 신입사원 채용이 줄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지난 2022년 향후 5년간 8만 명을 신규 채용하겠다고 밝힌 후 매년 1만 명 이상 채용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삼성그룹은 재계 5대 그룹 중 유일하게 신입사원 정기 공채를 진행해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등 20개 계열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했다. 올해 반도체 부문의 실적 부진으로 불거진 위기론에도 불구하고 채용 규모는 계획대로 유지할 예정이다.

반면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15개사의 신규 채용 인원은 최근 3년간(2021~2023년) 연평균 2만6,100만여 명으로 집계됐다. 15개 기업에 계열사의 채용을 함께 공시한 지주사가 포함됐음을 고려하면 30곳 이상의 대기업 신규 채용 인원이 연평균 1,000명에 못 미치는 셈이다. 올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지난 8월 인크루트가 실시한 조사(대기업 103·중견 117·중소 588곳 대상)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103곳 중 올해 하반기 채용계획을 확정 지은 대기업은 35.0%에 불과했다. 지난해보다 무려 43.8%포인트 하락한 수치로 최근 10년간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견기업은 50.4%로 절반 정도가 하반기 채용 계획을 세운 것으로 집계됐다. 전년보다 4.0%포인트 감소한 수치다. 중소기업은 전년 대비 10.6%포인트 감소한 47.4%가 채용 계획을 확정했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등 모든 규모 기업의 채용 계획이 지난해보다 하락한 것이다. 채용 규모도 감소해 100명 이상 채용하겠다고 한 대기업은 한 곳도 없었으며 두 자릿수 인원을 채용하겠다는 기업은 전년 대비 23.8%포인트 감소한 46.2%를 기록했다. 채용 규모가 10명 미만인 기업은 53.8%로 전체 조사 대상의 과반을 기록했다.

시총 30위권 기업 신규 입사자 중 ’20대 비중’은 52%

국내 대기업의 신규 채용이 줄어들면서 20대 청년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중이 늘어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8월 기준 20대 임금 노동자 338만9,000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146만1,000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중은 43.1%로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03년 이후 8월 기준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에 반해 20대 정규직은 같은 달 기준으로 △2014년 227만5,000명 △2018년 235만3,000명 △2020년 211만6,000명 △2023년 210만5,000명 △2024년 192만9,000명으로 감소세를 이어갔다.

특히 20대 비정규직 중 시간제 노동자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시간제 노동자는 동일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의 정규 근로시간보다 1시간 이상 짧게 일하는 노동자로 8월 기준으로 보면 2014년 41만6,000명에서 올해 81만7,0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단기 계약직도 늘어났다. 근속기간도 감소했다. 지난 5월 기준 취업한 경험이 있는 청년(15∼29세) 가운데 첫 일자리의 계약기간이 1년 이하인 청년의 비중은 31.4%로 통계가 공표된 이후 역대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더욱이 주요 대기업이 그룹 단위 대규모 신입직원 공채보다는 경력직 채용을 선호하면서 중고 신입의 입사가 늘었다. 실제로 시총 30위권 대기업 집단의 채용 인력 중 20대 청년 비율은 △2021년 57.5% △2022년 54.8% △2023년 50.8%로 하락했다. 대표적인 양질의 일자리로 꼽히는 대기업 신규 채용에서 20대의 비중이 전체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에는 대기업도 뽑아서 키우기보다는 즉시 전력화가 가능한 인력을 뽑으려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2~3년 정도 근무 경력이 있는 지원자를 신입 사원으로 뽑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조사 결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올해 초 한경협이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500대 기업 대졸 신규 입사자의 25.7%가 경력자였다. 이는 2022년 22.1%에서 3.6%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중고 신입의 평균 경력 기간은 1년 4개월이었다. 신규 입사자 중 1∼2년의 경력을 보유한 이들이 52.6%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이어 △6개월∼1년 32.8% △2∼3년 6% △3년 이상 5.2% △6개월 미만 3.4% 순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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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 인재가 아닌 전문성을 확보한 ‘즉시 전력감’ 원해

공채가 줄고 수시 채용이 늘어난 점도 큰 변화 중 하나다. 현재 주요 대기업 중 신입사원 공채 제도를 유지하는 곳은 사실상 삼성그룹뿐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대기업 채용에서 공채의 비율은 2019년 39.9%에서 2023년 35.8%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수시 채용은 45.6%에서 48.3%로, 상시 채용은 14.6%에서 15.9%로 꾸준히 늘었다. 고용노동부·한국고용정보원이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79%가 지난해 하반기 정기 공채와 수시 특채를 병행했고 정기 공채만 시행한 곳은 단 1%에 불과했다.

수시 채용의 확산은 기업의 채용 문화도 바꿔놨다. 범용 인재를 선발해 직무에 맞게 키워내는 정기 공채와 달리 수시 채용은 특정 직무에 맞춰 필요한 시기에 이미 전문성을 확보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조직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데 유리하다. 빈 자리가 난 개별 부서의 필요에 맞게 뽑는 ‘핀셋 채용’으로 기업에 따라서는 그룹 차원에서 총괄하지 않고 개별 부서에 채용을 일임함으로써 채용에 투입되는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즉시 전력감을 원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현업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을 충원하기 때문에 교육비용 절감을 기대할 수도 있다. 경총에 따르면 대기업이 신입사원 교육에 투입하기까지는 18~26개월이 소요되고 교육비용은 1인당 6,000만원 수준에 이른다. 하지만 채용 방식이 변화하면서 최근에는 신입사원 집단 교육이나 연수 개념도 사라지고 있다. 이에 일부 기업들은 그룹 연수원을 축소하거나 기능을 전환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중소·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계단식’ 일자리 이동

1차 노동시장이 경력직 위주의 수시 채용으로 바뀌면서 청년들의 구직 트렌드도 변화했다. 경력이 없는 20대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경력을 쌓지 못하고 경력이 없어 양질의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력직이 대기업 일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청년층은 중소·중견기업에 취직하는 비중이 높을 수 밖에 없다. 고용보험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15~34세)의 첫 취업처 99.3%가 ‘근로자 1,000명 이하 기업’으로 집계됐다.

중견기업을 징검다리 삼아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청년 노동자의 사례가 늘어나면서 중소·중견기업-대기업 간 계단식 인력 이동도 활발해졌다. 올해 6월 통계청이 발표한 ‘일자리 이동통계(2022년 기준)’를 보면 기업체 간 이직자는 415만9,000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6.0%에 달했다. 이직자의 71.3%는 중소기업 소속이었으며 이 중 12.0%는 대기업으로 이동했다. 대기업의 채용 문화 변화가 청년과 중견기업의 구직·채용 트렌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중견기업에서 1~2년 근무하고 ‘경력 점프’를 위해 이직하는 경향이 심화하면서 중견기업 역시 무경력 신입 채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채용 플랫폼 인크루트에 따르면 지난해 중견기업의 경력직 수시채용 비중은 67.6%로 대기업의 61.1%를 앞선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대기업 등 더 좋은 근무 조건을 찾아 신입직원이 이른 퇴사를 할 경우 중견기업들은 채용 비용 회수조차 어렵다. 한경협에 따르면 중견기업이 신입직원 채용에 들어가는 비용은 회당 2,000만원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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