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로 전락한 판사직, 전문성 저하·늑장 판결에 산업계도 ‘끙끙’
소송에 손발 묶인 기업들, "판결 늦어지는 만큼 피해 극심" '허리' 부러진 법원, 인사제도 개편에 고법 판사 '줄이탈' 승진길 막힌 판사들, "'돈보다 명예'에도 정도가 있다"
‘늘어지는 재판’에 기업들의 상처가 벌어지고 있다. 법원의 늑장 판결로 관련 사업의 개점휴업 기간이 길어질 뿐 아니라 기업 이미지 추락 등 무형의 손실도 불어나기 때문이다. 당장 코오롱생명과학이 골관절염 치료제 ‘인보사’ 판매허가 취소 소송에 손발이 묶인 기간만 해도 4년 7개월이다. 이 기간 동안 1심 재판이 종료되고 겨우 2심이 시작됐지만, 그 사이 국산 1호 유전자치료제 인보사는 국내에서 잊혀진 약이 됐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인보사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아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는 세계가 주목하는 국산 신약인데 정작 한국에선 법원만 쳐다보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도 법원 뒤꽁무니만 쫓아야 하는 기업의 입장은 난처하기만 하다.
“법원 늑장 판결이 산업 생태계 다 망친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은 오는 7일 인보사 판매허가 취소 항소심 선고를 내릴 예정이다. 당초 선고일은 작년 9월 22일이었지만 네 차례나 미뤄진 끝에 이날로 잡혔다. 법원 특유의 늑장 판결이 다시금 고개를 든 것이다. 법원의 늑장 판결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민사합의사건이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걸린 기간은 1,104일로, 2017년(663일)에 비해 66.5% 늘었다.
이에 산업계에선 지나치게 긴 판결 기간으로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이 높아졌다고 하소연한다. 사내 하청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권이 대표적이다. 비슷한 사안에 대해 HD현대중공업과 CJ대한통운이 2심에서 서로 다른 판결문을 받은 만큼 대법원 판단이 중요한데 정작 대법 판결은 5년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사실상 법원이 산업계를 위축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하청 노조가 승소하면 ‘노란봉투법’을 사실상 인정하는 셈이라 기업들은 교섭·파업 대응에 엄청난 비용 부담 리스크를 지게 된다”며 “어떤 결론을 내든 대법원이 기업들을 불확실성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늑장 재판이 기업에 ‘범법 기업’, ‘갑질 기업’이란 낙인을 찍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사례도 많다. 앞서 한화는 지난 2016년 태양광 전지회로 스크린프린터 업체인 SJ이노테크로부터 ‘기술 탈취’ 관련 민·형사 소송을 제기당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한화를 검찰에 고발했고, 형사 소송은 2022년 3월 대법원의 재항고 기각으로 무혐의 종결됐다. 민사에선 1심은 한화의 승소로, 2심은 SJ이노테크의 일부 승소로 마무리됐다. 법리적으론 민사재판이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나, 6년 넘게 이어져 온 지지부진한 싸움에 두 기업 모두 피해를 봤다. 한화는 검찰로부터 여러 차례 압수수색을 받았으며, 사회에서 ‘갑질 기업’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한화 관계자는 “태양광 스크린프린터 사업이 지연됐고 해당 업무를 하는 엔지니어도 대부분 퇴사해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며 “선고가 빨리 나왔다면 피해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길어지는 재판을 경쟁사가 공격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제약 업계에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특허분쟁만 3건이다. 2019년 시작한 대원제약의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 펠루비 특허분쟁은 1년 넘게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복제약 회사와 오리지널 제약사 간 특허분쟁이 장기화할수록 기업의 비용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진다”고 말했다. 최근엔 최고위급 경영자와 연관된 재판 지연 사례도 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3대 경영석학으로 꼽히는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의 말 그대로 리더에게 가장 부족한 자원은 시간”이라며 “기업이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기업 관련 중요 재판은 신속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고법 판사 이탈 ‘가속화’, 중심 못 잡는 법원
늑장 판결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되는 건 ‘법원의 허리’ 역할을 하는 고법 판사의 이탈이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전국 판사 수는 2017년 말 2,903명에서 2022년 말 3,016명으로 늘었고, 1심 재판에서 민사 합의사건 처리 건수는 같은 기간 102만 건에서 76만 건으로 줄었다. 판사는 늘고 사건은 줄어든 셈이지만, 정작 1심 판결 기간은 평균 294일에서 420일로 43% 길어졌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이 기간 동안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가 폐지됐다”며 “승진길이 막히면서 업무 동력을 잃은 고법 판사들이 줄줄이 이탈하니 전문성이 떨어져 재판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 사표를 낸 고법 판사는 2019년 1명에서 2020년 11명, 2021년 9명, 2022년 13명, 2023년 15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고법 판사들이 나간 자리는 신임 판사가 채웠지만, 경험이 부족한 신임 판사가 고법 판사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판사직 자체가 비주류로 전락하면서 전문성이 저하됐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법조계 인사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판·검사에 임용돼 공직에서 경력을 쌓은 뒤 40·50대에 대형 로펌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엘리트 코스의 전형이었지만, 최근엔 로스쿨을 졸업하자마자 20·30대부터 일찌감치 로펌이나 기업 등 민간으로 진출하려는 법조 엘리트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판·검사가 돼도 당면하는 현실은 박봉에 노후 보장도 되지 않는 형편이라는 게 법조인들의 하소연이다.
실제 일반 법관과 검사 1호봉 월급은 300만원을 갓 넘는 수준이다. 직급보조비나 특정업무경비 등 각종 수당을 더해도 연봉은 많아야 7,000만원 안팎이다. 결코 적다고 할 만한 액수는 아니지만, 삼성전자의 신입사원 초봉이 5,300만원, 성과급까지 더하면 7,000만~8,000만원에 달함을 고려하면 다소 애매해지는 게 사실이다. 버틴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중견 판사의 숨통을 틔우던 고법 부장 판사 승진 제도가 사라지면서 이 악물고 버텨봐야 별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이와 관련해 한 부장판사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판사를 하겠다고 손 들겠냐”며 “‘돈보다 명예’도 정도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말 취임한 조희대 대법원장은 재판 지연 해소를 거듭 약속했다. 이에 따라 법원행정처는 예규를 개정해 법관의 사무 분담 기간을 1년씩 연장하고 판사 증원을 위한 밑 작업에 돌입했으나, 언급했듯 판사 직종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모양새다. 당장 판사를 증원한다 하더라도 고참 인원으로 성장할 때까지 이들을 붙잡아 둘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신속한 판결을 위해선 결국 판사 전반의 전문성 제고가 필수불가결한 만큼, 재판 지연 해소는 당분간 요원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