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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도 알아듣는' 보고서를 써야 하는 조직은 망한다 - 삼성전자, 한국 벤처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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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th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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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 of GIAI Korea
Professor of AI/Data Science @ SI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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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말의 어느 추운 겨울 날, 국내 모 대학의 교수님과 함께 AI 대학 설립을 위해 제주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등의 지방 대학까지 찾아다니며 바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들은 이야기다. 그 교수님 밑에서 AI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라는 한 국내 대기업 산하의 이커머스 자회사에서 '벤처 투자' 업무를 한다는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하시더라.

  • 무슨 말씀 하시는지 어려워서 잘 모르겠구요, 해외 유명 대학 교수나 유명 기관에서 인증 받은 거 있나요?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투자하죠

그간 SIAI 학부 2-3학년 수준의 교육 자료가 많이 공유됐으니 그걸 기준점으로 삼으면, 당시 나는 학부 2학년 수준의 용어도 쓰지 않고 그 대화를 진행했었다. 대학 교육프로그램 만든다고 그 교수님이 가르치시는 AI 박사과정의 강의노트를 봤던 덕분에, 그 분들을 박사 과정은 커녕 학부 재학생 수준도 안 되는 분들이라고 상정하고 대화에 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은

  • 코딩 계속 하다보면 데싸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약자) 할 수 있는거 아니에요?

라던 분이었는데, 이 문장 하나면 굳이 더 살을 붙이지 않아도 위의 내 평가에 대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써라?

요즘 삼성전자가 10만 전자에서 5만 전자로 추락했고, 파운드리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 직전의 위기에 몰렸고, 1등 기업의 위상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 2류 기업으로 전락하는 일만 남았고, 심지어는 인텔처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혹평을 하는 분들까지 나올 정도로 위기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인의 자부심 같은 기업이 해외 언론에서 이런 혹평을 듣는 걸 보면서 썩 기분이 좋진 않다.

왜 그럴까 여러가지 원인 분석이 있겠지만, 난 아래 인터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중반에 보면 '서초'(삼성전자의 모든 의사 결정을 내리는 최상위 부서)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보고서를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써라'는 압박을 매번 받는다고 털어놓은 부분이 있다. 저 표현을, 그리고 저 위의 모 대기업 산하 벤처 투자 업무하신다는 분의 표현을, 나는 이렇게 바꿔 보고 싶다.

  • 나는 공부하기 싫으니까 내가 공부 안 해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입에 떠먹여줘
  • 나는 똑똑한 사람인데 너네가 이상하게 설명해서 내가 모르는거야

같은 종류의 변주를 수백가지도 더 할 수 있겠지만, 1절만 해도 다들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종류의 조직에서 들은 공통된 저 표현의 깊숙한 본질을 뽑아내면, 그들이 무능한데도 불구하고 '갑'의 위치에 올라가 있다는 뜻이다.

조직의 의사 결정권자가 무능하면 아래의 실무진들이 100% 자기 역량을 발휘 못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초등학생들이 조 단위의 매출액을 뽑아내는 (단순 아이디어 상품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최소한 그런 조직을 지휘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공감하기 매우 어렵다.

세상 대부분의 일들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영국 극작가 Bertrand Russell의 표현처럼 상세사항을 모를 수록 사건은 간단하게 보이고,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어렵고 복잡해진다. 윗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내리는 의사 결정은 현장 인력들 입장에서는 초등학생들의 철 없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외부 권위를 이용하는 종류의 표현, 리스크를 없애기 위해 XYZ를 안 하도록 빼버리는 종류의 의사 결정은 자기는 잘 모르니까 뭔가 의지하고 싶은 고객들을 유치하는 마케팅 할 때나 써야지, 기술력을 강화해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기업의 의사 결정에 쓰는게 맞는지 공감하기 매우 어렵다. 우리 회사 사례를 들면, 어느 개발 경력 10+년인 명문 K대 공학 석사 출신인 걸 강조하는 분이 해외 유명 회사들이 쓰는거라면서 ELK 스택을 우리 회사에 도입하겠다고 2년동안 붙잡고 있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떠나신게 생각나는데, 그 사건을 겪으면서 다른 회사들이 쓰는거라면 어지간한 인력들도 잘 따라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도전을 무조건 응원해줄게 아니라, 인력의 역량을 아주 철저하게 따져야겠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아니, 못 하는 것이 정상이고, 잘 하는 것이 비정상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고, 그래서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직접 하는게 더 낫겠다 싶어서 회사 인력 운용 방침을 아예 바꿨다.

그렇게 개발팀을 싹 내보낸 후, 나 혼자서 Elastic Search와 Logstash를 우리 회사의 새 서버에 셋팅하고 추천 알고리즘을 장착시키고, 그래픽화 툴을 만지다보니 굳이 Kibana 대신 D3나 Amchart 같은 JS 라이브러리를 웹사이트 위에 직접 쓰는 편이 더 효율적이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직접 손을 대면서 얻는 지식이 추가될 때마다 ELK 스택을 넘어서 회사의 웹사이트 운영 전략이나 서버 관리 방침, 나아가 조직 운영 시스템까지 바뀌는 현상을 몇 년째 겪고 있다. 단순히 ELK라는 기술 스택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직에 맞게 쓰기 위해 ELK에 관련된 지식, 주변 관련된 기술 지식, 그리고 회사 내부 사정까지 두루두루 알아야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내보낸 개발팀은 회사가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자기랑 관련 없는 일이라고 무시하는 일 투성이었는데, 돌이켜보면 실력없는 외주 업체 쓰는 꼴이었던 셈이다.

초등학생? 세상은 복잡해졌다. 앞으로는 더 복잡해진다.

어쩌면 저런 대기업들이 구축한 의사 결정 구조가 10년 전, 아니 20년 전까지는 맞았을지 모른다. 자사와 다른 조직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고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입장에서 현장의 '사소한' 문제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좀 삐끗해도 적당히 굴러가겠지 싶을 것이다. 20년 전이 아니라 지금도 그런 문제들은 많다. 사회적 위치에 따라 할 수 있는 말도 달라지고, 받게 되는 정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의사 결정 구조가 완전히 틀린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적어도 기술력이라는 영역만 놓고 봤을 때, 똑똑한 사람이 간단하게 머리를 굴려서 대략적이나마 현장 상황을 다 알 수 있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당장 내가 학부 2-3학년 수준의 교육만 해도 우리나라 SKY, SKP 출신의 명문대 박사들이 줄줄이 F 학점을 받고 자퇴한다. 부끄러워서 말도 안 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살아 남을려고 밤을 새고, 내가 석박 시절에 그랬듯이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펜을 굴리고 코드 치느라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다는 하소연을 하는 학생들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예전엔 해외 기업이 무슨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면 그 회사와 몇 년 기술 제휴를 하면 쉽게 기술을 빼돌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당장 기본 지식이 없어서 말 귀도 못 알아듣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위의 사례에서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유비 추리를 하면, 예전엔 현장의 전문 인력과 본사 전략기획실 간의 지식 격차가 대학생과 고교생 정도의 차이였다. 똑똑한 고교생이면 대학 서적을 혼자서도 독학할 수 있고, 쉬운 부분들은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선생님만 실력이 있으면 그 격차는 쉽게 메워졌다. 그런데, 요즘은 대학생과 중학생 이상으로 차이가 난다. 해외 주요 기술 기업과 한국 대기업의 기술 인력과 전략기획실을 놓고 보면, 박사과정, 학부과정, 중학생 정도의 격차가 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길 하면 '중학생'이나 '학부과정'으로 평가 받으신 분들이 자기 반성은 안 하고 버럭 화를 내기도 하더라. 저 위에 쓴 '초등학생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써라'는 류의 표현을 쓰시는 분들은 위의 학생들처럼 이를 악물고 공부하는 대신, 아래와 같이 거꾸로 욕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 나는 공부하기 싫은데 네가 가르쳐 주는 건 공부해야 되는 것 같으니까 그냥 네가 이상한 걸 가르친다고 음해할래
  • 나는 똑똑한 사람인데 너네는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이야기하니까 너네는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욕할래

그런 욕을 듣지 않도록 세련된 대화의 기술을 발휘해서 부드럽게 돌려서 표현해라고들 하지만, 아마 진짜 본질은 그들이 똑똑하고 잘났다고 추켜세워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앞에서는 추켜세워주고 뒤에서 예산을 배정받는 타협을 하는 것이 세상사는 지혜겠지만, 무능한 인력을 고위직에 올려놓은 조직의 최상급자가 반성하고 조직 문제를 고치는 것이 맞는 진정한 해결책일까, 아니면 전문 기술직에게 신 기술로 대화의 기술까지 배워야 된다고 압박하는 것이 해결책일까?

전문 기술직은 그런 곳에 발 들여놓기 싫으니까 이직 하느라 기껏해야 몇 달 월급 못 받는 걸로 끝나지만, 무능한 인력을 예산 배정하는 위치에 올려놓으면 투자금이 통째로 날아간다. 이미 한국의 벤처 투자사들이 몇 조원의 돈을 가짜 AI기업들에게 버렸다. 그 돈의 대부분은 모태펀드라는 이름의 세금이었고.

'전문가'가 '초등학생' 때문에 '현타'오는 조직이 성장할 수 있을까?

인텔이 요즘 망해가는 중이라는 이유가 R&D 전문 인력을 다 내보내고 비용 효율화를 했다가 기술력이 뒤쳐지니 추격하려고 해도 인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고작 학부 수준에 불과한 MBA 출신들이 고위직이라고 목에 온갖 힘을 다 주고는, 박사 출신들이 전문 연구하는데 예산 배정하는 것부터 갑질을 할려고 하면 어느 전문 인력이 그런 조직에 가고 싶어할까? ([기고] 'MIT공학 박사가 왜 하버드 MBA 밑에서 일해야 하나?') 전문가가 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해 거꾸로 초등학생 수준으로 대화의 수준을 낮춰야 하는 것이 많은 경우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겠지만, 초등학생 수준의 이해도로도 '갑'의 위치에 있는 분을 보조하기 위해 잃게 되는 전문 기술 인력의 물리적, 정신적 손실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다.

세종시에 모여있는 국책연구소들을 가보면, 해외 명문대 박사하고 국내외 교수자리 찾다가 어쩔 수 없이 연구소에 눌러 앉으신 선배님들이 행시 출신 사무관들이 배정해주는 프로젝트 하나 따려고 굽신거려야 하는 사실에 '현타' 온다는 하소연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몇몇 선배님들은 박사 재학 시절 지도 교수들이 아주 조금만 더 도와줬어도 해외의 괜찮은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만큼 실력파들인데, 목구멍이 포도청인 탓에 어쩌다 밀려밀려 학부 수준에 불과한 행시에 합격했다고 목에 힘을 잔뜩 준 사무관들에게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탈출하고 싶을까? 실제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탈출하는 사례는 은근히 많다. 인텔도 그렇게 고급 인력을 다 잃고 나니, 이젠 망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대화의 기술이라는 새로운 박사 학위를 하느니 그냥 전문 기술을 더 키우는 쪽으로 비교우위 전략을 쓰는 것이다.

지난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모 대기업 왕 회장님이 하이닉스를 인수하려고 내가 재직했던 투자은행을 자문사로 쓴 일이 있다. 그 왕 회장님과 매주 미팅을 하는데, 며칠 사이에 몇 천 장의 자료를 다 읽으셨는지 보고서 구석구석을 다 질문하셨고, 15년간 반도체 산업 애널리스트를 했던 우리 회사 홍콩팀의 MD가 매번 미팅만 끝나면 지쳐서 식은 땀을 흘리곤 했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 MD도 고작 MBA 출신의 비기술직군 출신인데다, 현장 출신이 아니다보니 아는게 많지 않았고, 그거 때문에 왕 회장님이 매번 벽에 부딪힌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우리가 보내준 자료 말고 어디서 찾으셨는지 영어와 일본어로 된 몇 천 페이지 자료를 거꾸로 우리한테 숙제처럼 내 주셨었다. 일제 시대에 교육 받으셨으니 일본어 잘하는 건 이해가 되어도 영어는 어떻게 저렇게 잘하는거지? 학습의 신인가? 저래야 대기업 회장하는구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앞으로 이런 식의 기술 격차는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좁혀질 일은 없을 것이다. 세간에서 AI라고 부르는 자동화 서비스로 저급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도 개발자들 다 내보냈는데 거꾸로 시스템은 더 개선됐다. 기술적으로 실력도 없는 상태에서 (ex. '코딩테스트만 통과하면 되지, 그런 고급 지식은 알 필요없다'는 어느 K대생) 보고서에 예쁜 색상만 잘 넣어서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쓰는' 능력으로만 윗 자리에 올라가는 기업들은 결국 오늘의 인텔, 오늘의 삼성전자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어차피 기술력 향상에 투자해도 실패해서 도태되는건 매한가지 아니냐고 반문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리고 그런 인력들이 압도적 다수인 것도 대학 운영하며, 직원 뽑아가며, 돈을 길바닥에 버려가며 뼈아프게 알게 됐지만, 실제로 기술력이 향상되면 그래도 누군가는 TSMC가 되고, 누군가는 SK하이닉스의 HBM 부서 팀장이 될 수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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